장면 설명
결혼식 당일, 신부대기실에서 아버지가 남긴 투박한 녹음기를 들으며 오랫동안 쌓였던 원망이 뜨거운 눈물과 진심 어린 이해로 바뀌는 딸의 독백.
지연
무뚝뚝하고 거친 아버지 밑에서 상처받으며 자랐지만, 누구보다 아버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예비 신부.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내면에 억눌린 감정이 많다.
대사 미리보기
화려한 생화로 장식된 신부대기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연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웨딩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낡고 투박한 카세트 녹음기가 놓여 있다.
녹음기에서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 재생이 끝난다.
지연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 천천히 녹음기를 쓰다듬는다.
지연
(떨리는 목소리로, 헛웃음을 치며)
...진짜 끝까지 치사해. 누가 이런 거 달래? 평생 윽박지르고 화만 내던 사람이, 이제 와서 테이프 덜렁 하나 쥐여주면 다야?
(눈물이 고이며)
얼굴 보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딸내미 화장 다 지워지게 진짜...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지연이 조심스럽게 녹음기를 들어 가슴에 품는다.
참으려 애쓰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지연
(원망과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나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열여섯 살 때, 내 스케치북 찢어서 난로에 던져버리던 아빠 얼굴.
미술학원 보내달라는 말이 그렇게 큰 죄야?
그때 아빠가 그랬잖아. 남의 옷 찌든 때 빼면서 사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줄 아냐고.
근데 아빠... 난 아빠한테 나는 그 퀴퀴한 다리미 냄새, 약품 냄새... 한 번도 창피했던 적 없어.
오히려 난 그 냄새가 좋았단 말이야. 땀 흘려 일하는 우리 아빠 냄새니까.
지연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화장이 번질까 조심스럽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지연
(흐느끼며, 목이 멘 소리로)
근데 아빠는 왜 평생을 미안해하면서 살았어? 다리미에 데어서 흉터투성이인 그 손...
내 졸업식 때도, 사진에 안 나오게 하려고 자꾸 등 뒤로 숨겼잖아.
내가 그 거친 손을 얼마나 잡고 싶었는데.
미안해야 할 사람은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한 난데... 왜 아빠가 미안해해. 바보같이.